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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말뜻
선비는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옛말에서 한자인 “유(儒)”를 “션븨”또는 “션ㅣ”로 적었는데, 이것은 곧 현대어인 “선비”의 본말이다.
그러나 이는 한자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현대어의 사전에서는 “선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① 옛날에 학식이 있되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
② 학문을 닦은 이를 예스럽게 일컫는 말
③ 마음이 어질고 썩 순한 이
이 풀이에서 ①②는 불충분하나 그런대로 인정할 수 있으나, ③은 선비의 해석으로는 부적격이다.
선비는 學識이나 詩文을 아는 것을 필수 요건으로 하며 德性만을 가지고 일컫는 칭호는 아니기 때문이다.
선비와 “사(士)”와의 관계
위에서 인용한 옛말에서 “유(儒)”를 선비라고 한 것을 지적했으나 “사(士)”또한 선비로 읽어왔다. 옛말에서는 션븨”등으로 기사하였다.
“유(儒)”는 “공자의 학문을 받드는 사람”이라는 특수한 뜻으로 쓰였으나 “사(士)”는 거의 우리가 말하는 선비와 같은 의미로 쓰여 왔기 때문에 다음에 중국에서 쓰인 사(士)의 성격이 세대에 따라 변해온 과정을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1) 주(周)대의 사(士)
주대는 관료체계에 임금 밑에 공(公), 경(卿), 대부(大夫), 사(士)로 등급을 나누어 대부이상은 국정에 직접 참여하는 관직이니, 오늘의 국무위원에 해당되며, 사(士)는 사무를 집행하는 사무원인데 이를 또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이것으로 보면 사(士)는 일반서민이 아님은 물론 관료에 해당하는 명칭이었다.
이 사실은 전국시대의 책인 맹자(孟子)에서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

(2) 춘추, 전국시대의 사(士)
사(士)는 직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역시 지배층에 속하는 계급으로 관료가 되기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었고 혼란한 시국에 자기 학설을 세워 여러 나라의 임금을 설득하러 나선 사람도 있었고, 또는 제자들을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공자, 묵자, 양자, 맹자, 장자 등은 모두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관직을 갖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사(士)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 추종자들도 사(士)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언제나 지도자를 자처하였지 피지배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며, 정신적으로 그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당시에 불의를 자행하고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여러 나라의 제후나 관료들보다도 자기들은 높은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사(士)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 여러 책에서 볼 수 있으며, 이 책이 우리에게 많이 읽혀왔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선비”와 “사(士)”는 매우 가까운 개념으로 인식되었고 현재까지도 불확실하지만 선비와 사는 공통개념으로 통하고 있다.

(3) 진(晉)대의 사류(士流)와 은일(隱逸)사상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여 높은 지식을 쌓고 원대한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관료로 진출하기를 단념하고 시와 술과 음악을 즐기면서 시골에서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노자와 장자, 주역, 불경 등을 탐독하고 토론하여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추구하니 그대표가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팔달(八達) 등이다.
이들은 스스로 높은 선비[高士]로 자처하였고, 산과 물,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산림을 찾고 그리하여 시나 문장에서 산수와 전원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었고 후대로 산수화라도 새로운 작품세계가 전개되어 당(唐)에 이르러서는 왕유(王維)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나타났다.

(4) 송명(송명)이후의 사(사)
남송(南宋)때에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이 한 학파를 이루면서부터는 학자들의 출신지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며 학통을 계승하는 풍조가 생겨서 교육과 학술의 중심을 이루었고 이곳의 출신자들은 대개는 관료로 진출하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도 선비로서 학계를 지도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위치를 얻게 된다.
이것은 또 진(晉)대의 은일(隱逸)과도 성격을 달리하는 부류에 속하며, 이것이 조선조 이래 우리나라의 선비와 가장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선비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통념으로서의 선비는 고려의 무신정권 이후부터 논해야 할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과거제도를 통하여 문관을 등용하였으므로 문학의 공정을 쌓은 인재들은 대체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인 정중부에 문신들이 멸절하였으나 최충헌의 정권으로 굳어지자 거세당한 문인들은 기용될 길이 막혔다. 시문은 뛰어났으나 진출할 길이 끊어진 이들은 스스로 모임을 만들어 시와 술로 서로 위로하며, 세월을 보냈으니 이것이 소위 강좌칠현(江左七賢)이다.
진(晉)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처지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문인들로 은일의 생활을 함께한 집단으로서 처음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대의 은일은 벼슬이 가능하나 스스로 나아가지 않은 것이며, 시문을 잘할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 자기들의 세계가 분명히 속인들과 구별되는데 비하여 강좌칠현은 벼슬을 하고 싶어도 나아갈 길이 없었던 점이 서로 달랐다.
몽고의 난이 일어나고 고려가 그들에게 굴종함과 함께 무인정권이 끝나고 문인들의 막혔던 출세의 길이 다시 열렸으며 원(元)과의 외교관계에 있어 문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때부터 문인들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고려 말에 원에서 수입된 주자학이 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어 대의명분과 의리를 강조하는 학풍이 강하게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원왕조가 패망하고 한쪽에 의하여 수립된 명(明)조가 들어서게 되니, 고려의 문신들은 명왕조에 귀속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들과 제휴한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정부를 뒤엎고 이씨의 조선왕조가 서게 되자 문인학자로 이씨의 세력에 따른 사람도 많았으나 또한 의리와 절조를 지키어 신왕조에 항거한 문인들도 적지 않았다.
강좌칠현이후 두 번째로 문인의 수난이었으며 관계에서 쫓겨나는 부류가 생기게 되었으니 이들을<선비>라는 범주에 넣어 무관할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학자들이 명분상 관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 대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세조시대에 단종복위사건이 그랬고 연산조 때에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위시하여 기묘와 을사의 사화가 그랬다.
관료로 있던 사람은 죽지 않았으면 쫓겨났고 재야 학자들도 벼슬길이 얼마나 불안한 사회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단념하고 시골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기로 작정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서경덕이나 조식같은 이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선비에 해당되고 각기 한 지역을 점령하고 거기에서 세력하여 이들은 사림(士林)이라는 집단을 형성하였다.
사색당쟁이 형성된 이후에는 조정에서의 파벌싸움이 그대로 각 지방에까지 파급되어 같은 당은 웅호하고 반대편은 공격하는 역할을 또한 선비들이 담당하였다.
선비의 조건
선비의 조건은
첫째 : 양반계층에 속해야하며,
둘째 : 시문에 능하며, 학문이 있어야하며(六藝:禮,樂,射,御,書,數에 능통해야 한다.) 학통과 천지통이 되신 분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셋째 : 선비로서의 품위를 지녀야 한다.
이 시대는 첫째 조건은 중요성을 잃고 반상의 구분이 없어 졌지만 자기 스스로의 삶과 행동에서 양반과 상놈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싶다.
선비의 사회적 위치
선비를 가리켜 포의(布衣)라 한다.
곧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 포의에 불과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명망이 있고 보면, 지방의 수령이나 도백이 그에게 인사를 오고 행정상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에게 자문을 구한다.
나라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선비의 연명으로 나라에 상소를 올려 국정을 비판하거나 혹은 중신을 규탄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런 지위를 갖지 않았으면서도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친구로 사귈 수 있으며, 국정에 대한 발언도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학식이 인정되어 정부에 추천되면 나라에서는 그를 은일(隱逸)로 초빙하여 관직을 주는 영예를 받기도 한다.
그는 지방에서 양반층의 지도자가 된다.
선비의 생활
1. 거주지
고려시대만 해도 관료들은 그들대로 출신지인 지방이 있지만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길에 들어서면 모두들 개성에서 살다가 개성 또는 그 부근에서 그대로 살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중앙에서 벼슬은 하더라도 그의 근거지가 지방일 때는 모두 지방으로 돌아갔다.
선비는 그 父祖가 벼슬하던 사람이며 자신이나 또는 자손이라도 언제나 벼슬길에 오를 것을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계층을 단순한 선비라 하지 않고 “선비와 벼슬아치”를 합친 말로 “사대부(士大夫)”라고 통칭하며 사대부는“양반”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는 사대부가 살만한 곳으로
“첫째 : 풍수 지리적 조건,
둘째 : 산물이 풍부하고,
셋째 : 인심이 좋아야하고,
넷째 : 자연경치가 좋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옛날 사대부들의 거주지로 남아있는 곳으로는 경북지방이 가장 많아 이언적(李彦迪)의 경주 옥산 독락당(慶州玉山獨樂堂), 이황(李滉)의 안동 도산서원(安東陶山書院), 양자징(梁子澂)의 창평 소쇄원(昌平瀟灑園), 윤선도(尹善道)의 해남 연동 구택(海南蓮洞舊宅) 등 적지 않은 곳을 손꼽을 수 있으나 건물, 정원, 가장중물들이 옛 모습대로 보존된 곳은 거의 없다.

2. 생활 환경
독서와 사색을 주로하며 산수와 더불어 정서를 함양할 수 있어 거기에 시가 나오고, 철학을 터득하는 환경이 돼야 할 것이다.

3. 집안세간과 문방제구
의장, 책장, 탁자 실내가구로는 문갑, 사방탁자, 책장 등이 고작이며 선비의 높은 지조와 뜻, 청렴결백한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